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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교사 한선생

[수석교사 한선생] 제멋대로 수석교사 생활하기

 
이번 글은 지난 글에 이어서 저의 이상했지만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던 한 학기 동안의 수석교사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공부 안하는 군기가 잔뜩 빠진, 생각하는 게 교감교장과 다를 바 없는, 커피 내리고 수다떠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는 수석교사로 첫 학기를 보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제멋대로 수석교사 생활을 했노라 할 수도 있겠는데요. '제멋대로'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렇게나 마구, 제 하고 싶은 마음 대로'입니다. 제멋대로 수석교사 생활한 내용을 통해 제가 생각한 수석교사의 역할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공부 안 하는 군기가 잔뜩 빠진 신규 수석교사
많은 수석님이 공부하느라 바쁘십니다. 교실혁명도 하시고, 또 전국단위 네트워크에서 자체 연수도 들으십니다. IB나 개념기반교육과정 등 교육과정 설계 이론을 마스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육당국이 바라는 것과도 일치합니다. 근데 저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이론에 동의할 수도 없고, 그것이 학교에 정착할 수 있다는 기대에도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량이라는 개념이나 백워드설계의 WHERETO나 GRASPS 모델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공부한 듀이와 브루너, 아이즈너와 같은 교육계의 학자나 그보다 더 어설프게 공부한 니체, 마뚜라나, 글래저스펠트와 같은 학자가 준 원리에 따라 유동성 있게 방법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이홍우를 위시로 한 국내파 교육철학자들의 논의가 더 감동적이었고 더 좋았습니다. 외국에서 수입한 방법론, 정확히 말해 특정한 템플릿에 끼워맞춰가며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사이비가 되어버리는 교육학이 폭력적으로 느껴졌고 싫었습니. 이미 교육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OECD나 여타 국제기구에서 연구된 내용을 시대의 흐름이니 하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관행도 거북합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勿施於人 , 己所不欲勿施于人)이라고, 제가 하기 싫고 제가 믿지 못하는 걸 선생님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해하기 위해 살펴보지만, 거기에 꼭맞춰 살 생각이 없고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당장 최근의 교육과정 개발이론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대표적인 교수들조차 서로 합의하지 않아 학자적 소견이나 해석에 지나지 않은 개념들이 40만 교원들에게 진리처럼 강요되는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학자적 소견이나 해석은...저한테도 있습니다.) .
 

 
하지만 공부는 계속합니다. 남이 준 구체적인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나 남이 준 구체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공부가 아니라, 생각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공부를 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짬을 내어 두 편의 논문을 투고했습니다. 하나는 체육교육연구의 방향으로써 철학과 연구방법에 대한 소고를, 다른 하나는 최근 이슈가 되는 저학년 체육교과 분리에 대한 선생님들의 진심을 반영한 정책적 방향을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연구를 하며 평범한 이웃인 선생님과 리더십을 발휘하는 열성 선생님들을 이해하고 동시에 거시적으로 교육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교육당국이 기대하는 것과 분명 다른 공부입니다. 그러나 저는 공장장보다는 개발팀장이 더 좋습니다. 보너스가 적고 대우가 시원치 않더라도 미치광이 과학자의 포지션을 사랑합니다.
 
생각하는 게 교감교장하고 다를 바 없는 수석교사
학교에 왔더니 몇몇 선생님께서는 제가 교장선생님께 대적할 대항마 정도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웃었습니다. 저는 교장선생님에게 평가받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더군다나 20년은 더 헌신한 선배님의 연륜에 어떻게 대적을...). 어느 학교나 관리자를 적대하고, 승진을 교사답지 않은 길로 인식하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근데 저는 일반승진을 꽤 준비하다가 수석교사를 지원한 사람이었습니다. 수업바라기 참교사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시도를 즐겨했고, 학교 외적으로는 학문활동을 계속했습니다(비전업연구자로서 박사학위 받고 논문 20편 넘게 썼으면 학문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공기관과 사기업을 가리지 않고 협업도 해봤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로서 경험은 못해봤지만, 교감교장선생님 고생하시는 걸 알고, 그 고생이 대략 어느 정도 힘든 일인지, 그리고 교사 생활을 하실 적에 얼마나 헌신하셨을지 잘 압니다.

만화 '약치기' 중 한 컷. ⓒ 양경수 작가

 
많은 관리자분이 학교내 조직의 응집성과 교사 개인의 전문성을 강조합니다. 쉽게 말해, 좋은 교직 문화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파괴되었고, 협력과 상생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각자도생하다가 각개격파당하는 것이 요즘의 학교입니다. 수석 생활하면서 교감교장선생님께서 제안하는 좋은 것이 있으면 편들어드리고 다른 선생님들 설득합니다(물론 반대로, 선생님들의 제안이 더 타당하면 어떻게 되든 간에 관리자분들께 제안하고 건의하며 설득합니다). 전문성을 강조하고 응집성을 강화하는 문화를 지향하는 부분에 대해 관라자분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다. 교육 트렌드와 관련해서 방법론보다는 정신적 지향, 숙지 보다는 공감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화에 관심이 많고, 교감교장선생님들의 방향성을 지지합니다.
 
커피 내리고 수다떠는 것 말고 하는게 없는 것 같은 수석교사
새 학교에 발령을 받았는데 공간도 없고 예산도 없습니다. 징벌방 같은 공간과 가구를 받았습니다(신발 벗는 온돌 바닥인 건 너무나 좋습니다). 수석교사로서 하는 저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제가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일은 커피 내려주고 수다떠는 것입니다.  로스팅한 뒤 잘 관리된 원두로 내리는 커피의 맛은 벌크 사이즈로 산 브랜드 있는 원두와 비교되지 않습니다. 발령 한달 만에 교장선생님께서 냉동칸 있는 냉장고도 사주셔서 냉동 칸은 맛있는 싱글오리진 원두로 가득 찼습니다. 원두는 내돈내산입니다. 이렇게 잘 준비되어 있지만 선생님들이 잘 오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부릅니다. 커피 한 잔 하자고. 커피 친구 구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리고 수석이 커피 먹자고 조르는 사람 같아지는 것도 우습긴 합니다만,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꼴랑 커피 한 잔 내려주고 잘보이거나 마음을 얻으려는 게 아닙니다.
 

 
커피를 함께 마시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수석인 저에게 동학년 조직과 같은 자연스러운 관계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90퍼센트는 먼저 부릅니다. 가볍게 찾아 올 수 있는 선생님들도 좀 생기긴 했는데, 제가 바빠서 못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와서 하는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화제는 주로 전문성을 추구하는 교사의 삶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이해하고 화합함으로써 상승(相昇)하는 문화가 왜 중요한지 이야기합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결국에는 생존의 문제로 귀결합니다. 험악해진 학교 주변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서로 전문성을 지지하고 돕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동학년도 아니라 같이 일할 일이나 일하는 모습을 보여줄 일이 없고, 어쩌다 술을 마시는 사이도 아니기에 커피 타임은 너무 소중합니다(또한 맛있는 싱글오리진 원두를 로스팅한 뒤 빠르게 냉동하는 것도 너무 소중합니다.). 
 
내가 잡은 수석교사의 방향성에 대하여...
첫째, 통찰력으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수석교사입니다. 수석을 찾아오는 선생님들의 고민이 업무의 문제이건 수업의 문제이건, 아니면 진로나 교직의 사회생활 문제이건 통찰력을 바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수석교사입니다. 예전에는 경험 많은 관리자분들의 역할이기도 했으나, 고유의 사무가 과도하게 방대해진데다 관리자를 적대하는 평교사의 증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학교에서는 방기된 영역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훌륭한 인격자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경험하고 공부한 것을 토대로 선생님들이 더 좋아지도록 돕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요즘 극단주의로 오염된 초등교사 커뮤니티를 보니 수석이 꼭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둘째, 선생님들이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지원할 수 있는 수석교사입니다. 자기 일의 반대는 남의 일입니다. 외람(?)될 수 있으나 대다수의 선생님들에게 정부 시책은 남의 일이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 문제만이 자기 일입니다. 트렌디한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그걸 기술 학습으로 밀어붙여서는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관심을 갖는 일을 더 잘하게 하고, 그러면서 트렌드를 한 번쯤 진지하게 관심을 두도록 하는 것이 낫습니다. 많은 선생님이 관심을 갖는 분야가 있지만 그것을 엄밀하고 지속적으로 탐구할 만한 동력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 하는 것을 지지하고, 문제가 되는 아이디어를 조심스럽게 직면하게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함으로써...선생님들이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기일을 하려는 동기, 다른 표현을 이용하면 열정입니다. 열정을 불어넣는 것이 전달을 위한 연수보다 중요하지 않을까요?
 
여전히 학교에서 저는 '사적으로는 미워하지 않지만 공적으로는 싫은' 사람입니다.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싶은 사람'일 수도 있고요. 아마 적은 수업시수와 알수 없이 바쁜 일정, 40분 내내 동료장학을 참관하는 것이 그 이유이겠다 싶습니다. 뭐, 짧은 경력과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기 마음에 안 드는 분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부 선생님들은 몇 개월 동안 자신이 평균에 평범한 수업을 하는 교사가 아닌 수업의 달인이었음을 느끼게 되었고, 교사 커뮤니티에서 다운로드만 하다가 업로더가 되었으며, 일찌감치 명퇴를 생각했지만 전문가가 되어 정퇴하는 교사로 목표를 바꾸기도 하고, 승진에는 미온적이었지만 각종 공모전이나 연구대회를 참가할 기운을 얻기도 했습니다. 전문성을 지향하고 상승하는 학교문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제가 나쁜 일을 한 수석교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수석교사는 교사의 교수·연구 활동을 지원하며, 학생을 교육"합니다( 초 · 중등교육법 20조 3항 ). 전문성 지원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데도 좀 당당합니다
 

 
 
제멋대로 다시 생각하기
저는 제 수석교사로서의 생활이 제-멋대로(자기 마음대로, 엉터리로)가 아닌 제멋-대로(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대로)였길 바랍니다. 아니, 그 의미를 더 정확히 전달하려면 제-멋-대로(자신이 가진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에 맞춘)하는 가 맞겠네요. 물론, 특수함을 추구합니다만, 점진적으로 일반성도 갖춰야 하겠지요. '트렌디-' 하게요. 
 
마지막으로... 2024년 7월 12일, 제 14회 수석의 날,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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