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육과정의 대세는 개념기반교육과정이나 개념기반교육과정이 아주 잘 구현된 IB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2022개정 교육과정도 그러한 대세를 반영해 설계된 것이니, 이 둘을 거스르는 건 시대에 뒤쳐진 사람의 꼬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꼬장이 힘을 받는 건 현장의 많은 동료가 '강요된 대세'를 거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념기반교육과정이나 IB 프로그램(그 둘의 뿌리가 거의 같으니, 이하 개념기반교육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을 비판하는 이유가 국가 교육에 대한 충정에서 나오건, 변화에 대한 거부건 간에 많은 분이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과교육전공자로서, 일부 교육과정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통적인 교육과정 체제, 정확히는 교과 중심의 교육과정 체제를 흔드는 것에 대해 여러 모로 고깝습니다. 교과마다 고유한 내용과 형식이 있는데, 2015 개정교육과정부터 시작된 일부 교육과정 연구자들의 교과교육과정에 부여한 제약들은 교과교육 연구자들의 입장을 아예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교육과정 연구자들의 범교과교육이나 교과통합에 대한 신념과 행동은 생존을 위한 권력투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고합니다. 그간 우리 교육과정의 근간이 되었던 교과 교육과정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매크로)개념을 중심으로 교과를 통합해 가르치는 것을 강권하는 것이 교과교육학의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 교육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독점하려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저 뿐일까요?
저는 체육교과 연구자이지만, 전공 못지 않게 인식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식론이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앎에 이를 수 있는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입니다. 일정부분 인지과학이나 심리학과 겹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인식론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식론의 세 가지 주제는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지식이 무엇인지, 어떻게 학습하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문제로 치환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인식론은 우리의 유능함에 대한 설명에도 도움을 줍니다. 지식을 단지 기억이나 사고력을 넘어선 적응행위의 총체라고 볼 때, 유능함은 무엇인지, 어떻게 유능해질 수 있는지, 유능함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인식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의 인식론에 대한 관심은 학생들의 학습보다는 교사들의 유능성 문제, 연구자의 연구역량 때문에 더 깊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능한 교사와 그렇지 못한 교사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지, 놀라운 학술적 성과를 내는 연구자와 그렇지 못한 연구자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운동을 잘하는 교사가 체육수업을 못하는가, 그 반대로 스포츠에 서툰 교사가 체육수업에서 유능함을 발휘하는가 역시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핍니다.
어찌되었든, 인식론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개념기반교육과정(그리고 IB 프로그램) 역시 인식론적 관점에서, 그들의 프레임을 사용하자면 인식론이라는 '개념적 렌즈'로 평가합니다. 에릭슨의 지식의 구조나 레닝의 과정의 구조 역시 인식론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제 판단은 이들의 인식론이 인간의 앎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런 인식론에 기초한 교육과정 설계 이론이나 프로그램(IB의 경우는 프로그램 또는 프레임워크)을 국가 수준에서 차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의 주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교과를 넘어선 사고입니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있지만, 전통적인 교과교육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문제인식입니다. 개념기반교육과정의 인식론은 개념을 기반으로 학습하게 되면 폭발적인 전이가 가능하고, 그를 통해 교과의 벽을 넘어선 문제해결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저는 그 폭발적 전이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해 의심스러운데, 그 이유는 교과를 넘어선 사고가 개념이나 개념의 관계로 진술된 일반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제간 벽을 넘는 연구를 주로 해 왔습니다. 워낙 초등체육이라는 분야가 현장에서 엉망진창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저는 다양한 학문으로 체육교육이라는 현상을 해석해 왔습니다. 교육학이 기본이 되지만, 심리학과 철학, 사회학을 넘나들며 초등체육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궁리해 왔습니다. 체육분야가 아닌 교육철학 관련 논문도 써 본 일이 있으니, 이 정도면 학제간 연구 혹은 간학문 연구를 해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으로 볼 때, 개념기반교육과정의 창시자들이 이야기하는 '개념적 렌즈를 통한 학문의 통합'은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온 갖 변수가 복잡하게 엉킨 현실 문제를 탈학문적으로 보는 일은 한개의 개념적 렌즈로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 속에서 다양한 학문적 아이디어(내러티브)를 발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제 경험으로, 폭발적인 전이는 없습니다. 특히 개념간의 관계로 진술된 일반화 자체로는 결코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구체적 사실 혹은 구체적 사실들로 종합되어 재구성된 내러티브 지식(브루너가 말한 그 내러티브 맞습니다.)이 전이되는 것이며, 이것이 전이되기 위해서는 복잡성으로 가득한 현실 문제에서 자신이 아는 내러티브와 유사한 구조를 발견해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까지 정식 논문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개인적 목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념기반교육과정의 틀에 교수학습의 모든 현상을 구겨넣기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료를 살펴보면 틀에 적용한 적합한 예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용하기 가장 좋은 예를 빼앗긴 채, 적용하기에 부적절한 영역에서도 틀을 적용하길 요구받게 됩니다. 그리고 적절히 틀에 맞추지 못했을 때 무능의 멍에를 쓰게 됩니다. 틀이 완전하지 않거나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적용을 제대로 못한 책임은 대체로 개발자의 몫이 아니라 적용자의 몫이 됩니다. 총론 개발자와 교과교육과정 개발자의 관계가 그렇고, 교과교육과정 총책임자와 그 밑에서 작업하는 공동연구자의 관계가 그렇고, 교육청 담당자와 현장 교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이런 일은 굳이 개념기반교육과정이 아니더라도, 늘 있어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개념기반교육과정의 주창자들도, 이들의 이론을 주도적으로 끌어다 온 연구자들도, 그들의 논문 중에 제대로 된 간학문적 연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야기하는 교과를 넘어선 사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사고에 대한 설명은 객관적이고 납득할만한 것일까요? 학제간 연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주창자들 본인 조차 거의 경험해본 적도 없는 사고방식에 대해 구조화하고 그것을 가지고 국가 전체의 교육을 흔드는 것이 참담할 뿐입니다.
개념기반교육과정이나 IB 프로그램의 전이에 대한 허위과장 광고에 대해서, 몇몇 통찰력 있는 선생님들이 이미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설픈 적용으로 학생들에게 오개념을 형성하고 있는 문제나, 겉보기에 문제없어 보이지만 사고의 과정에서 오류가 있는 수업 실천에 대해서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개념기반교육과정이나 IB 프로그램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수업 방법이나 단원 설계는 교육을 바라보는 꽤 가치 있는 예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권의 책을 통해 보기로, 꽤나 좋은 아이디어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저의 인식론이나 기존의 교육에 대한 지독한 배타적 관점은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념기반교육과정 일변도의 교사 연수가 거북합니다. 그런 연수에서 기존의 수업을 낡아서 더 이상 좋은 수업이 아닌 것인 양 암시하는 것이 싫습니다.
물론, 제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과 수석교사로서 개념기반교육과정을 이해하고 선생님들의 자학자습을 돕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마 당분간 저는 주변의 선생님들을 독려하며 개념기반교육과정으로 단원을 설계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기만이 아닙니다. 그 과정이 매우 의미있기 때문입니다. 교사 수준에서 개념기반교육과정을 이해하고 적용해보는 경험이 선생님의 교육전문성을 급격히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긍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전체의 항구적인(못해도 우리 교사 공동체가 4~5년 지속해야 할) 방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념기반교육과정의 프레임은 연구해보고 일부 적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일괄적용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개념기반교육과정이건 IB 프로그램이건 이 틀로 학교교육과정을 뒤집어 놓는 것이 탐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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