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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하여/교육 고찰: 개념과 이론

[체화인지와 교육] 체화인지의 관점에서 되돌아 본 역량 교육 신드롬

 

    『전이와 역량 교육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
    글의 순서 (제목을 선택하면 해당 문서로 이동합니다.)

        0.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떠나보내며(프롤로그)
        1. 조립과 분해라는 적절하지 않은 은유
        2. 체화인지의 관점에서 되돌아본 역량 교육 신드롬
        3. 전이를 위한 변명

    각 포스팅의 내용이 길지 않습니다. 전체 내용을 읽길 추천합니다.

 

 

  우리는 삶의 여러 장면에서 '조화'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경우 여러 측면을 조화롭게 고려하기 보다는 한쪽으로 치우쳐 결정합니다. 특히 위치를 분명히 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죠. 정치나 사상의 문제의 경우에서 중립은 곧 '회색'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러한 문제는 교육적 가치관의 문제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당대에 쟁점화된 교육 이슈들의 경우 교육자들은 ‘전부 아니면 전무’ 또는 ‘양자 택일’의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마찬가지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역량중심교육과정의 체제 아래 교과서를 써야 했지만, 사실 인식론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 의식은 공감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오류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번 글에서는 체화인지 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역량 교육 신드롬을 되돌아봅니다. 아, 이 글 역시 저의 책 <체화된 앎과 교육>에 있는 내용을 편집한 것입니다.

 


 

핵심역량을 기르는 교육?


  앞선 글에서 교육 문제에서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짧게나마 살펴보았다. 여기서 내용이라고 한다면 교과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 정보를 의미한다. 그에 비하여 형식은 인간이 문제해결에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인 창의적 사고, 추론능력, 기억력과 같은 정신능력을 의미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 둘의 관계는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며,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앎을 감각운동적 경험으로서 우리 자신의 총체적인 구조에 의해 산출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내용과 형식은 한 데 묶여 있는 것이다. 체화 인지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경험을 내용과 형식의 관계로 나누는 것은 부호(내용)와 알고리즘적 장치(형식)를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어색하다(그것은 체화인지 이론 이전의 패러다임이었던 계산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최근 역량을 강조하는 교육은 이 둘을 분리한다는 인상을 준다. 형식이 핵심역량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핵심역량이란 다양한 현상과 문제들을 적절하게 해결하는데 필요한 지식, 기능, 태도의 총체이다. 실제로 우리 교육에서는 2009 개정교육과정 이래 핵심역량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이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2015개정 교육과정의 경우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공동체 역량의 여섯 가지를 핵심역량으로 두고, 이것을 각 교과의 역량을 통해 구현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해석하기에 따라 교과 교육의 최종적인 목적은 핵심역량을 기르는 것에 있으며, 교과교육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게 한다.


  역량이라는 개념에 도취된 사람들은 종종 문제해결에 대하여 마치 교과 이외의 다른 것이 필요한 것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리고 교과를 상대적으로 낡은 것이어서 실제적인 일을 해결하는 능력과 관련성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낮추어본다. 역량 중심 교육에 몰입하고 있는 교육자들은 대체로 전통적 교과는 문화를 답습하거나 문화를 이어받는 것에 관심을 둘 뿐이며, 역동적인 미래문제를 해결하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역량교육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전통적 교과 교육은 과거에 초점을 두고 있고, 역량 교육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교육은 역량을 기르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급진적 역량주의 교육의 문제점


  몇 가지 생각해보자. 역량을 갖추면 하나의 능력이 다른 사례들로 폭발적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생각은 타당한가? 그리고 그 역량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경험에 공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인가? 몇 가지 극적이고 간단한 상황을 가정하여 스스로 대답해보자. 스포츠 상황에서 창의성이 탁월한 사람은 건축 설계에서도 창의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내는가? 그 사람은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한 창의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은 제한된 재료를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근사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역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재주들은 내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이다. 한 분야에서 돋보이는 역량이 다른 분야에 전이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역량의 범용 가능성에 대해서 논하는 일은 인간 경험의 성질에 대해 논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모든 분야의 창의성은 같은 창의성인가? (사진출처: https://www.flickr.com)


  물론 실제적으로 필요한 해법을 산출하는 능력을 가르쳐야 하고 그것을 해 낼 수 있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역량 기반의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통적 교과를 대체한 역량 중심의 교육과정을 통해 문제의 해결책을 산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산출능력'으로서의 역량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산출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저장(여기서의 저장이란 감각운동적 경험을 통해 체화된 지식을 의미한다)'된 것을 바탕으로 '산출'한다. 아무런 지식이나 기능이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일상적인 사례를 통해 생각해보자. 사칙연산을 못하는 사람이 그보다 고차적인 수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공을 던지고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 영역형 게임(하나의 공을 두고 서로 차지해 골을 넣는 스포츠의 일종)의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럭비를 잘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능함이란 ‘구조화’된 경험을 효과적으로 '산출'하는 능력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내용과 형식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실상은 서로 붙어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컨대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과 개념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들의 각 종(種)별 특징을 아는 것과 각 종들이 가지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종들을 범주화하는 능력은 이것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각 종의 '특징'을 아는 것을 '내용'이라고 보고, 유사한 것끼리 '분류'하는 능력을 '형식'이라고 보았을 때, 종들의 생물학적 특징을 알지 못하면 분류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각 종이 가진 특징에 대한 지식을 가진 상태에서 분류하는 것이지, '분류하기'라는 별개의 능력을 바탕으로 동물들을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내용은 형식이 작동하는데 근거를 제공한다.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사회학적 지식이 문제해결의 근거로 활용되며, 스포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움직임과 관련된 지식이 문제해결의 근거로 활용된다. 이런 면에서 내용과 형식은 따로 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다.


  역량 중심 교육을 강조하는 이들은 그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많은 단편적 정보와 기술을 숙지하는 교육을 해왔다고 지적한다. 교육이나 미래 세대에 대한 이들의 걱정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들은 중요한 문제점을 놓치고 있다. 우리 교육의 치명적인 문제는 특정한 개념을 특정한 사례에만 적용하게끔 만드는 데에 있다. 우리가 공교육에서 수많은 개념을 학습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겪는 수많은 문제에 적절히 사용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개념을 고작 특정한 평가(특히 객관화된 답을 요구하는 평가)에 제시된 문제만 사용할 수 있게끔 배웠기 때문이다.

 

 

교육의 쓸모에 대하여


  누구든 배운 것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길 기대한다. 그러나 개념들을 표상적으로 학습하는 교육으로는 배운 것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기 어렵다. 학교에서 학습한 것이 이후의 삶에도 유용하게 쓰이려면 경험이 체화되어야 한다. 즉, 어떤 개념을 언어로만 접하고 기억하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와닿을 수 있도록 충분히 감각운동적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개념을 배울 때 보고, 듣고, 접촉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다른 경험들과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언어적으로 배우는 것보다는 학급회장을 선출하고 학급 회의에서 학급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러한 감각운동적 체험은 개념을 일대일 대응의 고정된 의미가 아닌 내용과 방법을 상황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은유로써 학습하게 한다.


  학교 교육이 쓸모 있으려면 단순히 교과를 답습하고 암송하고 숙지하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교과의 기초를 바탕으로 산출해보도록 하는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 교과는 후향적으로 확인된 인간의 경험 영역이다. 인간의 지적 행동이 타고난 생물학적 특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문화로 내려오는 것들은 인간의 생물학적 능력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산출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반영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부정하고 형식만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보다는 문화로서의 교과를 경전처럼 떠받드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교과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적어도 교육에 있어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현재의 시점에서 진일보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과에서 다루는 어떤 내용이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쓸모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통적인 지식을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것에 잘못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 연필은 이용해 괴발개발 글씨를 쓰는 도구일 뿐이겠지만, 누군가는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거나 복잡한 기계를 제작하기 위한 초안을 설계하는 도구일 수 있다. 우리는 사용한 결과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연필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연필을 폭넓게 사용할 수 없게 만든 교육 방식이다. 학습한 경험을 제때 적합한 방식으로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 문제는 교육 방식의 문제인 것이지, 교육 내용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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