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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하여/교육 고찰: 개념과 이론

[체화인지와 교육] 조립과 분해라는 적절치 않은 은유

 

    『전이와 역량 교육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
    글의 순서 (제목을 선택하면 해당 문서로 이동합니다.)

        0.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떠나보내며(프롤로그)
        1. 조립과 분해라는 적절하지 않은 은유
        2. 체화인지의 관점에서 되돌아본 역량 교육 신드롬
        3. 전이를 위한 변명

    각 포스팅의 내용이 길지 않습니다. 전체 내용을 읽길 추천합니다.

 

 

  저는 체화인지 이론에 빠져 있는 사람으로서 앎이 은유적이라는 입장에 동조하는 편입니다. 체화인지에서는 앎이 감각운동경험에 의해 형성되어 은유적으로 작동한다고 봅니다(적어도 조지 레이코프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은요). 저는 사람들의 인식론적 발상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누구든 인식론을 철학적으로 따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경험으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지식에 대한 관점을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을 전공하지는 않지만 교육과정을 포함해 교사의 유능함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매우 미흡하긴 합니다만 따로 인식론에 대해 공부하며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로서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모든 교육분야의 연구자나 특정 교육 흐름에 대한 지지자들이 철학(또는 인지심리학, 인지과학 등)에 진지한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이 어떤 명확한 철학의 사조를 따르기 보다는 경험에서 형성된 인식론적 발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역량을 강조하는 교육의 연구자나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역량주의 교육 안의 은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저의 책 <체화된 앎과 교육>에 포함된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조립과 분해라는 은유에 대하여

 

  우리는 간혹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사건을 해석할 때 조립과 분해라는 은유를 활용한다. 조립과 분해라는 개념은 주로 장난감이나 가정용품 등의 사물을 필요에 따라 끼워 맞추거나 해체하는 구체적인 조작을 통해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구체물을 조작하지 않더라도 사고만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과와 레몬, 토마토, 참외는 색깔에 따라서는 빨간색의 사과, 토마토와 노란색의 레몬, 참외로 묶을 수 있지만, 과일에 속하는 사과와 레몬, 채소에 속하는 토마토와 참외로 묶을 수도 있다.


  이러한 조작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다룰 때도 일어난다. 예를 들어 특정한 기준에 따라 개념들을 분류하거나(예: 생물들을 원핵생물계, 원생생물계, 식물계, 균계, 동물계로 분류하는 것),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고 있는 그보다 작은 개념을 분석하는 것(예: 지능검사도구를 만들기 위해 인지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지능을 언어이해, 지각추론, 작업기억, 처리속도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개념들 사이의 포함관계를 파악하는 것(예: 구체적인 정보를 찾기 어려울 때 그보다 포괄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검색하는 것)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는 개념을 어느 범주에 포함하거나 빼는 것과 같은 사고의 조작을 경험한다.


  조립과 분해라는 은유는 인간의 경험을 마치 기계의 부품을 조립함으로써 전체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을 분해하면 전체를 구성하는 부품을 조립 이전의 원래 상태 그대로 회수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석하게 한다. 그러나 조립과 분해의 은유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늘 적절한 것은 아니다. 경험과 같은 추상적인 것은 동식물이나 기계와 같은 구체물처럼 정확하게 관찰하고 조작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추정할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것이 구체물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물질들이 겉으로 비슷한 성질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다른 성분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현상이 겉으로 보았을 때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로 구성하는 원리가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추상 그 자체인 경험이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해 속단하고 그것이 조립되고 분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칫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원주의적 아이디어

 

  우리는 수많은 삶의 장면 속에서 공통적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능력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우리는 급변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적절히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교육이 사람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갖추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여러 사회적 문제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장차 일어날법한 문제들을 교육으로써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과정에서 나온 관점 중 하나가 사람들에게 다양한 문제들에 공통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능력은 특수한 상황들 속에서의 문제해결 과정으로부터 종합한 것으로, 각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경험적 요소들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한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형식’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에는 기억력이나 창의력, 추론 능력, 관찰능력, 논리적 사고력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형식들은 오늘날에도 모두에게 가르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형식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 속에는 형식에 능숙하면 내용이야 무엇이든 언제든 끼웠다 뺄 수 있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형식을 강조하는 교육은 구체적인 ‘내용’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형식을 강조하는 교육에서 무엇을 내용으로 삼느냐는 단지 소재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한 교육에서 진정으로 가르치려는 것은 형식이다. 이 관점에 따른 교육에서는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능력인 형식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내용을 내세우고, 그것을 일시적이고 특수하여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예컨대 형식으로서의 의사소통능력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한 언제나 중요하다. 그것에 비하여 내용으로서의 모스부호는 한때는 중요하게 사용되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모스부호는 그것보다 더 좋은 다른 의사소통 매체로 대체되었다는 점에서 주변적이다.


  교육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의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내용은 언제든 형식과 결합한다. 그런데 형식은 다양한 맥락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반면 내용은 낡아서 폐기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 점에서 형식을 가르치는 교육이 더 가치 있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듀이는 '형식도야론'이라고 했다(그리고는 형식도야론을 비판했다). 그런데 형식도야론의 아디이어는 타당한가? 이 문제는 좀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역량중심교육, 어째서 형식도야론을 떠올리게 하는가?

  

  전통적인 교과 체계를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역량을 중심으로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이러한 형식 지향의 교육관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대체로 역량 교육에 공감하고 있는 교육자들은 기존의 교육을 명제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사고력이나 의사소통능력과 같은 역량을 길러주는 것이 실질적인 문제해결능력을 기르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교과 교육 내용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며, 이 역량을 교육의 중심에 두는 새로운 질서에 따라 기존의 전통적 교과 체계를 재편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급진적으로 역량 교육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교과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지식 교육’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정한 역량이 어떤 내용에서 길러진 것이든 간에 다른 내용에서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의 교육적 구호 속에는 ‘무엇’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떻게’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며, 역량을 길러준다면 그것이 다양한 상황에서 전이되어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역량을 강조하는 사람 중 일부는 지식과 기능의 가치가 계속해서 변하므로 내용보다는 그것을 다루는 능력인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육에서 내용을 떼어 내고 역량만 따로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을 내용과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역량주의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경험의 내용(지식과 기능)은 형식(역량)에 맞춰 조립되기도 하고 분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우리의 경험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거나 관찰된 대로 특수한 경험의 영역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는 가정이 포함된다.


  그런데 정말로 형식은 내용과 무관하게 언제든 사용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어느 교과든 교육을 통해 기대되는 능력을 설명할 때 분석적 사고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렇다면 수학교과에서의 분석적 사고와 사회교과에서의 분석적 사고가 같은 것인가? 그리고 수학교과의 과제에서 분석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사회교과의 과제에서 분석능력을 비슷한 수준에서 드러낼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있는가? 만약 한 사람이 두 교과의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분석력의 수준이 다르다면 두 교과의 분석적 사고가 같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부분의 합이 전체와 같을 것이라거나 전체를 분해해도 분할된 것 속에서 전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비롯된다.

 

 

 

외부 관찰자의 오만한 시선에서 비롯된 인식론적 한계

 

  앞서 밝힌 것과 같이, ‘교과의 내용은 수단일 뿐, 역량(형식)을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관점은 완전하지 못하다. 지식이나 기능(내용)과 무관하게 형식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형식만 갖춘다면 어떤 내용이든 상황에 맞게 찾아 활용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을 언어로 환원하고 다시 그 언어를 실제에 적용하는데 생기는 오류이다. 단지 언어적 표기에 초점을 둔다면, 국어든 미술이든 일종의 문제해결과정을 포함하므로 이 교과들은 공통적으로 문제해결력이라는 형식을 가르칠 수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교사의 입장에서 두 교과의 차이를 단지 내용의 차이(국어과 미술의 교수요목)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적이거나 논리적 문제와 시각적 감각에 대한 문제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생각해볼 때 형식이 각 교과에서 중시하는 내용을 앞선다는 주장은 인간의 경험을 '조립과 분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적절하지 못한 은유에 매몰된 결과이다.


  사실 형식과 내용의 분리라는 것 자체는 내부자의 입장(실제로 그 문제를 처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다. 형식과 내용의 구분은 철저하게 외부자의 관점에서 현상을 해석한 것일뿐이다. 이것은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창의적으로 일을 수행을 했다고 해도, 그 일을 처리할 당시에는 자신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단지 모든 과제가 끝난 뒤 다른 사람의 작업한 결과에 자신의 결과를 비교해보거나 그의 작업을 누군가 창의적이라고 평가했을 때 비로소 창의적이었다고 판단할 뿐이다.


  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형식과 내용의 구분은 교육학자나 교육자가 교육과정을 수립하거나 학습자들의 특성을 분류하고 평가할 때의 편의성을 위한 것이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믿음에서 형식으로써 실제적 문제해결을 강조하는 교육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역량을 발휘해야 할 실제 장면과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지식이나 기능을 갖추지 않고서는 어떠한 문제해결능력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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