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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하여/교육 고찰: 개념과 이론

체화된 앎, 그리고 교육

이 글은 『체화된 앎과 교육』의 머릿말을 블로그 게시물에 적합하도록 일부 수정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지식기반사회라고 한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지식이나 정보를 온갖 가치를 창출하는 근원이자 개인이나 집단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자원으로 여긴다. 다수의 사람은 지식이나 정보를 소수의 전문가가 생산해내는 것으로, 그리고 대중은 그것을 그저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글은 그러한 생각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한다. 과연 보통 사람은 지식의 생산에서 소외되는가?


  체화주의 또는 체화인지라는 분야에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 누구건 지적 행위의 주체이며, 지식기반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식을 생산하고 있음을 가정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누군가는 모든 사람이 지식의 생산자로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름지기 지식이라면 언제나,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것을 만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생각의 밑바탕에 지식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이나 사회적으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관점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지식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는 관점으로 객관주의, 표상주의, 실증주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객관주의와 표상주의, 실증주의를 짧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교육자라는 필자의 처지에서, 이 세 가지 개념을 가장 간단히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 객관주의: 관찰자가 자신과 대상을 완벽히 분리함으로써 세상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관점.
• 표상주의: 관찰자가 감각한 외부의 환경을 ‘부호화’하고, 이러한 부호들을 ‘계산’한 결과를 행동을 통해 표출한다는 관점.
• 실증주의: 객관화된 ‘관측’을 통해 현상을 ‘수량화’함으로써 물질의 성질과 현상의 원리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관점.

  이 세 가지 관점은 사회적으로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것 이외의 방식으로 지식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관점들을 우리의 일상에 적용하면 어색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일 중 많은 것들이 객관적 진리와 관계가 없거나, 부호화되고 계산된 것으로 설명하기 어렵거나, 실증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소하게는 점심 메뉴로 어느 것을 선택했을 때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올지, 거창하게는 정부 부처의 각종 규제가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할지의 문제가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에 자료를 통계적 기법으로 분석한다거나 이론화된 공식에 각종 수치를 대입한들 결과를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체화 인지'는 앞서 설명한 세 가지의 전통적이고 주류적인 지식에 대한 관점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인 용어로 체화라는 말은 ‘직접 경험하여 자기 것이 됨’을 뜻하지만, 여기에서의 체화는 체화 인지 이론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특성을 고려하여 지식의 주체가 환경과 ‘완전히 들러붙음’의 의미로 사용된다. 만약 인지과정이 주체가 환경과 결합하여 산출한 것이라면, 우리가 하는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을 인지적 과정 또는 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환경과 결합하여 산출한 것을 지적 행위로 본다면 지식의 가치는 진리를 반영하였는가 보다 지적 행위가 상황과 조건에 적합했는가에 달려있게 된다.

 
  체화 인지는 인간의 환경 의존성과 창발성에 초점을 둔다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인 동시에 문화적인 존재로, 생물학적 구조인 감각운동기관을 통해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자기 자신과 환경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체화 인지적으로 해석한 앎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서 산발적으로나마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 앎의 목적은 세계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절히 적응하는 데 있다.
•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앎이 작용한다.
• 경험은 통합적이므로 인지-정의-심동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 앎은 감각운동적 경험에 의해 형성되며, 문제 해결 과정에서 은유처럼 작동한다.
• 지적 행위란 뇌나 이성이 계산한 결과가 아니라 몸 전체가 환경과 결합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 상호작용을 하는 대상 간의 복잡성으로 인하여 결합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며, 상호작용의 결과는 완전히 예측될 수 없다.
• 개체의 행위는 개체가 자신의 경험과 환경의 어느 측면에 주의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유능함이란 지식이나 기능을 보유하고 산출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특성과 환경의 제약을 활용하여 적합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앎을 체화 인지 이론으로부터 도출한 하나의 은유로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이러한 은유를 통해 전통적이고 주류적인 지식관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부분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로, 객관주의가 외면하고 있었던 현상에 대한 인과적 설명의 불완전함이나 지적 행위에서의 주관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둘째로, 표상주의가 전제하는 계산주의적 사고(알고리즘적 사고) 이외의 방식(휴리스틱적 사고)의 가치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셋째로, 지식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관측과 통계로 설명되는 실증주의를 넘어선 다양한 지식 생성 방식에 대해 허용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제안한다.


  체화 인지적 관점에서 앎을 본다면 우리 문명이 발견한 지식을 완전무결한 진리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의 지식은 언제든 기각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거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지식이 쓸모없는 것’이라는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객관이 없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앎에 대해 더 치열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지식은 언제나 참된 것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하며, 적절치 못한 경우 대체되거나 폐기될 수도 있다. 앎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지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속해 있는 분야의 지식을 검증하고 발전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출 것을 요구받게 된다.

 

  체화 인지 이론에 따르면 지식을 생산하는 것과 소비하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매 순간 지적 행위를 통해 지식을 생성하고 있으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지식을 진보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집단지성의 질은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지적 능력에 달려있다. 구성원들이 적절한 지식을 생성하고 잘못된 지식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느냐에 조직의 명운이 걸려 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지식의 심사, 생산, 배포를 소위 지적 권위자나 전문가라고 불리는 집단에게 위임해왔다. 그들이 정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과 무관하게 지식을 다루고 있는지, 그들이 공급하는 지식이 정말 어떠한 편견 없이 모든이의 입장이나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가 복잡해질 수록 위험하고 안일한 것이다.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공동체의 불완전한 지식을 끊임없이 조정하는 일에 참여해야만 한다.


  한편, 체화 인지에 근거한 앎의 은유를 따르면 인간의 성장 문제, 즉 교육을 달리 보게 된다. 앎을 체화적으로 보게 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방향에 눈뜨게 된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양의 정보와 기술을 ‘보유’해야만 탁월해진다는 믿음을 공유해왔다. 그리고 사회가 보편적인 것으로 규정한 광범위의 지식이나 기능을 갖추지 못한 상태를 결핍으로 간주하였다. 또, 개인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모두가 비슷한 지식과 기능을 높은 수준으로 갖추어야 하는 무한 경쟁 상황에 처하게 했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이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나 실제 상황에서 꺼내 쓸 수 없는 것, 그리고 그다지 필요 없는 것을 배우느라 삶이 피로해지고, 매일의 성취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앎을 체화된 것으로 여기면 개인의 차이는 결핍이 아닌, 각자 다르게 주어진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서로 다른 조건(한계, 제약)을 가진 채 환경의 특정한 부분과 결합한다. 즉, 각자가 가진 성향이나 능력에 맞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환경을 활용하는 방식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유사해 보이는 문제라도 각자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처리 방식을 활용하거나 다른 자원(지식과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 예컨대 운동 선수들은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는 기술과 전략을 구사하는 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달리한다. 사람들이 계산할 때도 수식의 복잡한 정도에 따라서 암산을 하거나(스스로) 필산을 하거나(종이와 필기구를 활용하여) 계산기를 사용하는(기계장치를 활용하여) 식으로 환경을 활용하는 방식을 달리한다.


  앎이나 능력을 환경 안에서의 작용으로 규정하게 되면 교육과 학습의 방향도 달라진다. 체화된 앎은 우리의 행위가 세상 곳곳과 연결된 결과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인간이 환경을 활용해 개인이 가진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이것은 교육이 탈맥락적인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보다는 개인의 제약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적절하게 행동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데 집중해야 함을 시사한다.


  앎에 대한 체화적 관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보다 더 환경에 의존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타인을 비롯한 환경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으며, 그 안에서만 능력을 발휘한다. 동시에 우리는 지식의 일방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환경 안에서 지식을 비판적으로 소비하고 능동적으로 생산한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각자 고립된 채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에 따라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함으로써 서로를 이롭게 한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무엇을 얼마만큼 가져야 하느냐에 대한 관심의 일부를 우리가 환경과 어떻게 결합해야 하느냐에 대한 것으로 옮기게 만든다.


  필자는 체화 인지라는 인지과학 이론으로부터 도출해낸 인간 경험에 대한 은유가 우리에게 자신의 학습과 경험, 삶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전통적이고 주류적인 지식에 대한 관점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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